고전문헌학은 어떤 학문인가?

Posted by on Feb 24, 2014 | No Comments
고전문헌학은 어떤 학문인가?

루돌프 파이퍼는 20세기 최고의 서양 고전문헌학자다. 고전문헌학은 어떤 학문인가? 서울대 안재원 교수의 해제를 보자. “파이퍼에게 서양 고전문헌학이란 한 문헌이 최초의 원전으로부터 어떤 과정을 거쳐서 현재 우리에게 오게 되었는지를 해명하고, 그 전승 과정 중에 생겨난 오류들을 교정해서 최초의 원전을 복원하려는 학문을 뜻한다.”(p.300)

고전문헌학이 왜 필요한가? “전승된 문헌 가운데 원저자의 필체로 기록된 문헌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이다. 설령 원저자의 기록이라 하더라도, 원저자의 필체를 알고 있지 못하기에 그것이 실제 원저자의 기록인지 아닌지를 확인할 방법이 없다. 그래서 고전문헌학자들은 전승된 문헌에 대하여 원저자의 기록, 저술이 아니라는 가정 아래 작업을 진행한다.”

고전문헌학의 목표는 무엇인가? “전승 문헌에 생기를 불어넣어 문헌을 원래의 모습으로 살려내는 일”이다.(p.301) 어디까지나 일차적 목표는 원전의 복원이다. 원전 그 이상의 해석을 하지 않는 것을 덕목으로 삼는다. 이러한 학문의 정체성에 의문을 던지고 싶다. 누구를 위한, 무엇을 위한 고전의 복원이란 말인가? 해석의 지양이 덕목이라니?

니체가 떠오른다. 그의 전공이 고전문헌학이다. (니체는 스위스 바젤대 고전문헌학 교수로 학자 생활을 시작했다.) 니체는 고전문헌학의 특징인 복고적인 경향에 반발했다. 앞서 언급한 질문을 그도 품었던 것이다. 니체의 관심은 ‘어제의 고전’이 아니라, ‘고전과 오늘’에 있었다. 이러한 문제제기로 인해 기존 학계와 대립한 니체는 결국 고전문헌학을 떠났다.

니체의 문제제기는 자신에게는 합당했다. 그는 전통과 가치를 해체하는 철학자이기 때문이다. 고전문헌학의 의미가 희석된 것은 아니다. 오히려 더욱 분명해졌다. 니체의 작업인 “고전과 오늘” 탐구는 ‘고전’의 존재가 선행되어야 했다. 고전문헌학 덕분에 고대 세계의 탐구가 가능하다. 모든 학자들이 니체처럼 고전문헌학을 떠난다면, 누가 고대의 문헌을 복원시킨다는 말인가. 니체의 문제제기는 고전문헌학엔 정당하지 못했다.

 

고전문헌학자의 존재이유를 번역가의 노고로 설명할 수도 있겠다.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에 관심 있는 분이라면, 천병희라는 이름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현존하는 최고의 그리스어, 라틴어 번역가다. 선생은 『그리스 비극의 이해』와 같은 해설서를 쓰기도 했지만, 그의 학문적 사명은 원전을 번역하는 일이다. 그가 번역해 놓은 책들의 목록을 보라.

<일리아스>, <오뒷세이아>,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 <아이스퀼로스 비극전집>, <소포클레스 비극전집>, <에우리피데스 비극전집>, <아리스토파네스 희극전집>, <시학>, <그리스 로마 에세이>, 헤로도토스의 <역사>,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정치학>, 플라톤의 <국가>,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기>, 크세노폰의 <페르시아 원정기>, 투퀴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역이 아닌 그리스어, 라틴어 원전을 번역했다. 번역가 덕분에 다른 언어권의 지성을 탐구할 수 있듯이, 고전문헌학자 덕분에 고대의 텍스트가 현대에 되살아난 것이다. 번역이 동시대에서 매개체 역할을 한다면, 고전문헌학은 통시대적인 매개체인 셈이다. 텍스트 번역과 번역된 텍스트를 우리 문화에 맞춰 해석하는 일은 별개의 작업이다. 둘 다 고유한 가치가 있고, 모두 필요한 일이다.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겠지만 고전문헌학도 세대를 거쳐서 이어져야 한다. 세대마다 번역이 새롭게 이뤄져야 하기 때문이다. 학문의 발전이 이뤄지려면 다른 나라의 훌륭한 텍스트가 번역되고, 중요한 고전이 복원되어야 한다. 번역과 고전문헌학이 중요한 까닭이다. 각 나라의 고유한 학문을 자생적으로 발전시키는 노력은 고전문헌학과 배타적인 관계가 아니다.

<인문정신의 역사>는 서양의 고전문헌학의 역사를 담은 책이다. 고전을 발견하고 복원하는 일에 일생을 바친 인문주의자들이 대거 등장한다. 페트라르카와 보카치오, 에라스무스처럼 낯익은 학자들이 있는가 하면, 리처드 벤틀리, 빙켈만 등 낯설게 느껴지는 학자들도 등장한다. 책은 매우 흥미진진했다. 인문학 발전사에 대한 내 관심이 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쉬이 권하고 싶지도 않고, 대부분의 독자는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누가 어떤 책을 발견했고, 복원하기 위해 무슨 노력을 했는지에 대한 서술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기도 할 테니까. 다음의 진술들은 책을 읽으며 중요 표시를 해 둔 대목들이다. 여러분의 관심도는 어떠한지 알아보기 위해서 한번 살펴보시길.

“페트라르카가 선구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대목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이미 13세기 후반과 14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비중 있는 시인과 학자들이 매우 집중적으로 고전문헌들을 연구하고 있었고, 좀 더 정확한 고전 라틴어로 글을 쓰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었다. 또한 여러 측면에서 서로 상이했다고 해도 같은 경향의 운동이 다른 나라들에서도 진행되었다.” (p.12)

“페트라르카가 고전 작가들과 교부들을 차별하지 않았고 똑같은 열정으로 그들의 텍스트를 수집했기 때문이다. 페트라르카는 교부들 가운데서 그가 늘 가장 소중히 여겼던 아우구스티누스 다음으로 특히 암브로시우스와 히에로니무스를 존경하였다. 그는 고대 작가들이 아카데미아 학파, 스토아 학파, 기독교 어디에 속하든 구별하지 않고 도덕에 대한 그들의 공통된 가르침을 따르고자 노력했다.” (p.25)

“페트라르카와 달리 보카치오는 문헌 비판 전통 이전의 전승을 중시하였다. 그는 리비우스와 사랑에 빠졌을 때 텍스트를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제21~30권, 그리고 제31~40권을 번역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리고 보카치오는 로마 작가들의 분실된 필사본들을 찾는 작업을 계속하면서도 텍스트 비판의 공적을 세울 노력은 전혀 하지 않고 필사본을 회복하는 데 만족했다.” (p.43)

별다른 재미를 못 느끼셨다면, 책 구매를 지양하시기 바란다. 끝까지 이런 내용이 이어지니까. 공부를 지속하려면 자신의 흥미를 잃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관심사가 아니면 과감히 건너뛰는 것도 하나의 요령이다. 건너뛰기엔 매우 중요한 책이라면 책의 가치와 의의 정도를 이해하여 기억해 두면 된다.

 

나는 왜 힘차게 권하지도 않을 책을 소개했는가? 이 책의 유익은 무엇인가?

첫째, 인문학의 발전과 부흥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알게 된다. 인문학의 발전이 고전 문헌들의 복원과 궤를 같이 하기 때문이다. 둘째, 고전 문헌들의 복원과 발전에 대한 정확한 지식을 접할 수 있다. 이것은 저자의 학문적 철저함 덕분이다. 셋째, 인문학을 공부하기 위해 읽어야 할 일급의 텍스트를 간접적으로 접한다. 다루는 방식이 지루하긴 하지만, 그저 그런 텍스트가 아니라 ‘고전’을 다뤘으니까.

옮긴이는 책의 특징 하나를 자백(?)했다. “깊은 학문성이 있는 책이기에 대중성이 없지만, 소중한 책이라며 번역을 맡겨준 도서출판 길에게 감사드린다.” 맞다. 대중성이 없는 책이다. 지적 허영심으로 달려들기보다는 인문학의 발전사, 고전문헌학에 관심이 있는 분들만 읽기를! 책을 안 읽어도 좋다. 고전문헌학의 가치를 기억하는 것만으로도 의미 있으니까.

- 때론 책 안 권하는, 조르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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